기억나지 않지만 삶에 영향을 주는 ‘숨겨진 트라우마’는 실재할 수 있을까?
이번글에서는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트라우마가 존재할 수 있는 심리학적 근거와 그 영향, 그리고 이를 인식하고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 무의식의 작동 원리와 감정 치유의 통찰을 함께 담았습니다.
1. 기억나지 않는 상처,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대개 트라우마라고 하면 뚜렷한 사건, 예를 들면 사고, 폭력, 학대처럼 기억에 남을 만한 극단적인 경험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확한 기억조차 없는 상태에서 트라우마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특정한 소리나 장소, 사람과 마주했을 때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불안, 공포, 회피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가 그러한 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 기억에는 남지 않았지만 뇌와 신경계에는 각인된 ‘기억나지 않는 트라우마’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특히 유아기 또는 매우 어린 시절에 겪은 충격적인 경험은 뇌가 발달 중이기 때문에 기억으로 저장되지 않지만, 신체감각과 정서 반응으로 무의식에 각인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한 여성이 특정한 남성의 목소리 톤을 들으면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자리를 피하고 싶어 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상담 과정에서 유아기 때의 폭력적인 부계 경험과 연결될 수 있다는 큰 의미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시간이 흐른 뒤 특정 자극에 의해 불현듯 감정 반응을 유발하며, 본인은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고통을 겪습니다.
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트라우마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2. 기억되지 않은 트라우마의 심리학적 근거와 영향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기억은 단순히 사건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신체 반응, 상황 맥락 등 다양한 요소가 얽힌 복합적인 과정입니다.
특히나 해마(hippocampus)는 장기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인데, 이 부위는 만 3세 전에는 충분히 발달되지 않아 영유아 시절의 기억은 명확히 남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편도체(amygdala)는 공포와 같은 정서 반응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며, 해마보다 빨리 활성화되기 때문에 유아기에도 정서적 충격은 뇌에 각인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건 자체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당시 느꼈던 감정이나 신체 반응은 무의식적으로 간직하게 됩니다.
실제 사례로, 한 청년은 항상 사람 많은 공간에서 불안함을 느끼며 무기력해졌는데, 상담을 통해 어릴 적 유치원에서 겪었던 집단 괴롭힘이 무의식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억압된 기억은 반복적인 악몽, 신체화 증상(두통, 위장장애 등), 자존감 저하, 대인관계 회피 등으로 나타납니다.
본인은 이유를 모르지만 끊임없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무의식 속 기억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의심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3. 결론: 기억나지 않는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
기억나지 않는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있어 핵심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현재 경험하는 감정 반응과 신체 반응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다루는 것입니다.
심리치료에서는 이를 위해 감정 중심 치료, 신체 지향적 치료, 예술 치료, 최면 치료 등이 활용됩니다.
특히나 감정 중심 치료(Emotion-Focused Therapy)는 감정의 뿌리를 탐색하고 억압된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신체 지향적 치료(Somatic Experiencing)는 신체 감각에 집중하여 무의식적으로 저장된 긴장을 풀어내는 데 효과적입니다. 한 여성 사례자는 이유 없이 반복되는 공황 발작으로 고통을 겪었는데, 신체 치료 과정에서 특정한 촉감과 감정이 연계되었고, 이는 유아기 때 겪었던 병원 입원과 의료적 절차에 대한 공포감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나타나는 불안, 무기력, 회피, 과잉 반응 등을 단순한 성격적 결함으로 보지 않고, 그것이 무의식의 신호일 수 있음을 이해하는 자세입니다.
기억나지 않더라도 우리 안의 몸과 감정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신호를 존중하고 다정하게 마주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열쇠입니다.